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브라운 (문단 편집) ===== [[제5차 초공작전]] =====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상당수의 소비에트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국민당 지배영역에서는 유격전과 파괴공작도 쉽지 않아 중앙 소비에트는 오로지 중앙 소비에트에 의존해야 했다. 경제적 상황은 국민당의 경제봉쇄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아직까진 자급자족할 수 있고 외부와의 교역도 가능했다. 중앙 소비에트는 국민당과의 싸움에 맞서 4만명의 신병을 충원하는 등 정규군의 군세를 급속도로 증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원병으로 충당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은 강제 징병이 많아 20~30%에 달하는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병역을 기피했다.] 국민당으로부터 많은 무기를 노획해 무장 상태는 호전되었으나 중화기 부족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리고 수송능력이 결핍되어 있던 것도 큰 문제였다. 이때 [[류보청]]이 정규부대의 편성에 대한 건의를 올려 오토 브라운의 심의 이후 혁명군사위원회의 재가를 받았다. 이는 홍군을 소련군 편제를 모방하여 개조한 것이었지만 무장과 인력의 턱없는 부족 때문에 소련군보단 당연히 심각하게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치공작으로 군기가 엄정하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오토 브라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체류한 기간 동안 심각한 대민범죄는 강간 1건이 전부였으며 이 역시 신속하게 범인이 총살되었다고 한다. 간부들의 질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토 브라운은 일찍이 상하이에서 육군대학을 만들어 간부들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루이진에 도착한 상태에 육군대학이 개교하여 100명의 학생이 있었으나 류보청과 저우언라이를 제외한 간부들은 여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의 대부분을 포로가 된 국민당 장교들이 맡았기 때문에 독일군의 중화기 중심의 전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오토 브라운은 경장비만을 갖춘 유격부대를 위한 전술규범을 창안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민당 출신 장교들이 새 전술을 배우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자 오토 브라운은 이들을 서서히 교체했다. 한편 토치카 전술을 앞세운 국민혁명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오토 브라운은 11월 건녕의 전적사령부에서 저우언라이, 주더와 전술회의를 가졌다. 오토 브라운은 총사령부와 전적사령부를 통합하고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건녕에서 루이진으로 이동하며[*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혁명군사위원회 의장, 정치부 총주임 등을 겸임하고 있으니 중앙에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겨서 한 제안이었다.] 1군과 3군의 지휘권이 필요할 경우에 혁명군사위원회 참모에게 위임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승인되어 1934년 초에 실시되었다.[* 마오쩌둥은 1940년 이 주장이 오토 브라운의 지휘권 탈취 시도라고 주장했으나 저우언라이는 이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